카우치 사건 1년, 그 오해와 진실?
7월 24th, 2006 at 09:26pm 낭장
작년 7월 30일 한 생방송 음악프로그램에서 무명밴드의 멤버들이 공연 도중 하반신을 노출해 물의를 빚은 바 …
http://news.nate.com/Service/natenews/ShellView.asp?ArticleID=2006072408535724187&LinkID=2
작년 카우치 사건은 대부분 국민들은 기억을 할 것이다. 나도 정말 잘 기억하고 있다. 그때 이 사건과 관련하여 글을 썼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정말 내가 오해를 하고 있었는지를…
언론이나 다른 메카니즘에 의해 내가 조정당하고, 진실을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 당시 글을 쓸 때 무척이나 고민을 했었다. 그 고민이 1년후에도 여전히 유효한지 시간의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을 평가할 수 있는 계기도 되는 것 같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1) 그 두명이 다 카우치가 아니였고, 한 밴드는 카우치, 한 밴드는 ‘스파이키 브래치’라는 다른 밴드였다.
2) 무대의 추체였던 럭스는 무혐의로 풀려나고 카우치 멤버들은 집행유예로 3개월간 구속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들이 그 당시 내가 가졌던 생각들에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래는 내가 일년전에 썼던 글이다. 당시에는 블로그라는 신기한 것과 만나지 못한 때였다. 새삼스럽다.
"블랙리스트는 하나의 저항의 상징으로 인식된다 해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저항을 억압하는 쪽에서는 블랙리스트이지만, 운동권 학생, 노동운동자 등 저항하는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영웅리스트였던 것이 역사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산업화, 민주화 과정이라는 것을 거치면서 이런 저항문화와 관련된 의식과 문화가 현재도 살아서 엉뚱한 “선”과 “도덕”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있다. 블랙리스트에 올려지면 영웅이 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면 탄압과 압제자가 되는 것이다.
일제 20년대말 시단을 풍미했던 퇴폐주의가 있다. 이 퇴폐에는 저항이 숨어있다. 소극적 저항이라고 하기도 한다. 70년대 장발족과 미니스커트는 기성 권위와 답답함에 대한 나름대로의 저항의 레토릭이 살아 있었다. 나찌 30년대 퇴폐도 또한 잘 모르지만 그럴 것이다.
이번 인디밴드(?) 카우치의 음악캠프에서 행위도 마찬가지로 새로움과 변화에 대한 탈출, 현존체제에 대한 의식적인 도전의 방정식이 나름대로 담겨 있어야 한다. 그 나름의 번뇌와 진정함이 느껴져야 한다. 그래야 퇴폐가 아니고 뭐 어쩌고 저쩌고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퇴폐가 퇴폐가 아니기 위해서는 진정함의 전제와 논리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이런 전제와 논리가 뒷받침되기 위해서는 걸러짐이 필요하다. 그런 문화집단, 공동체가 스스로 그들 나름의 자율과 자정 기능에 의해서 스스로 걸러지면서 자유스러워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는 예술인의 “진정”이 들어 있어야 한다. 공중파 방송에서조차 성기를 드러낼 정도의 그들에게 번뇌와 진정함이 그들에게 있는가? 성기는 보여주면서 얼굴을 가리는 것은 또 무엇인가? 공중파 방송을 강간하고, 시청자를 성희롱한 그 의도는 참으로 퇴폐적이랄수 밖에 없다. 구구절절한 변병도 더욱 구차하고, 인디밴드나 홍대 비대윈가 하는 집단도 코미디다.
자기반성과 자정의 노력보다는 지지서명 같은 것이나 받고, 죄는 미워하되 음악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으로 자신들의 무거운 짐을 내려 놓으려 하는 발칙함을 보이고 있다. 그 발칙함에는 뻔뻔함이 그들 집단에 내재되어 있음을 잘 증명한다.
죄도 음악도 미워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놈과 음악을 엉뚱하게 써 먹는 놈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공동체라는 것은 오랜 우리나라의 전통이다. 그래서 염치를 알게 되고, 개인과 사회가 나름대로 조화를 이룬 것이다. 법으로 규정되지 않았어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었고, 같이 살아가고 한 솥밥을 먹는 공동체로써의 공동책임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문화가 스스로 자정 기능을 포기하거나 방기하여 공공성을 침해할 경우(저항권을 인정하는 경우는 예외)는 당연히 공적 간섭이 있어야 한다. 또 그것이 공중파 방송이나, 공공장소에서 전국민을 상대로 욕을 보인 경우까지 오게 되었다면 당당연하게 간섭해야 하고 그것은 정의다. 불의에 저항하는 것도 정의지만, 퇴폐에 저항하는 것도 정의다. "
일년전의 글을 읽어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블로그에 나의 기록을 차곡차곡 쌓아간다면 언젠가는 시간의 깊이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이 글은 사회/교육에 속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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