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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전(國展)’의 명암

4월 11th, 2007 at 09:49am cuty

‘대한민국 국전(國展)’

30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대한민국 국전(國展)’ 명암(明暗)

지난해 제 25회째를 맞이한 대한민국 미술대전.
해마다 치러지는 미술대전은 예술계에서 유난히 잡음이 많다. 한국미술협회(미협)가 주최하는 미술대전에 대한 시비는 해마다 불문율처럼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은 1949년 시작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후신으로서, 정부가 운영해왔으나 1982년부터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을 거쳐 1989년부터 한국미술협회에 운영이 이관되었고 이름도 바뀌었다.

사실 미술대전에 대한 시비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벌써 십수 년간 미술대전을 둘러싼 시비가 연례행사처럼 벌어져온 까닭에 미술대전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정작 상을 받은 작가는 미술대전의 수상경력을 내세우지도 못하는 형태다. 즉 작가로서의 커리어에, 잡음이 끊이지 않는 미술대전이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미술대전의 모태인 국전(國展)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전은  1949년 시작되어 1981까지 당시로서는 매우 역사적이고도 권위 있는 상이었다. 일제강점기의 문화지배수단에 동조했다는 비난으로 얼룩지기도 했지만 1930년대 선전에서 입상하는 것은 예술가로서 입신양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였다. 국전은 미술대전의 모태로서 국내 민족 미술인들에게 기회를 넓혀주는 긍정적인 효과를 주었지만 점차 그 의미가 퇴색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국전’을 알아야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 이해

한국 현대미술의 기점을 설정하는데 있어 그 근거는 다르나 대체로 일치를 보이는 시점은 많은 미술단체들이 등장하는 1957년으로 볼 수 있다. 이때 등장한 단체들은 공통적으로 반국전을 기치로 기성화단에 대해 도전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이 새로운 미술창조를 위해 결별을 마지않았던 국전은 어떤 양상을 띠고 있었으며 그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도 끊이지 않는 잡음 속에서 20년 이상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또한 반국전 세력에 의해 한국 현대미술의 방향이 정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국전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한다.
국전이란, 대한민국미술전람회(大韓民國美術展覽會)의 약칭으로, 그 규정 2조에 명시되어 있듯이 “우리나라 미술의 발전 향상을 위해” 정부가 주관하는 미술진흥책의 하나로 출발하였다. 국전이 창설된 것은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된 다음해인 1949년의 일로 동양화부, 서양화부, 조각부, 공예부, 서예부(사군자 포함)의 5대 부문으로 시작되어 후에 건축부와 사진부가 추가되었다.
해방 후 화단에서는 미술 자체를 위한 예술 운동이나 단체의 결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정치적·사회적 혼란은 미술가들에게도 갈등과 대립의 장으로서의 미술세계를 구축하게 했으며, 특히 민족미술의 구현을 내세우면서 사회주의 문화이념을 표방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잡으려는 좌익계열이 적극적으로 행동함으로서 우익세력과 심한 마찰을 빚었다. 그러나 보수우익세력의 집권으로 정부가 수립되자 미술정책도 국가정책에 편승하여 문교부고시 제1호로 창설된 것이 ‘국전’이다. 이러한 국전 창설의 목적에 대해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국전 창설의 진의는 정부 수립 후 그때까지 방향을 못 잡고 있었던 전체 미술인들에게 정치적인 신념을 심어주고 국가적인 보호와 육성을 제공하는데 있었다. 민주진영의 미술인들에게 그들의 거점을 제공한 것이 국전이다.”

민족미술 구현하지 못하고, 좌익과 우익의 마찰로 퇴색의 길 걸어

명분상 국전은 ‘우리나라 미술의 발전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창립되었지만 해방공간시기에 좌익 미술인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던 민족미술인들을 감싸줄 수 있는 보호 장치로서 ‘국전’이 창설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전은 30회를 마지막으로 약 30년이라는 장구한 기간동안 존속했지만, 수많은 잡음을 일으켰고 아권투쟁의 온상이 되면서 유명무실 퇴색되었다. 국전이 퇴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시대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식민지시대 선전의 형태와 성격을 무비판 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 땅에 권위주의와 아카데미즘을 한층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우리나라 미술의 발전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창립된 국전은 해를 거듭할수록 모든 작가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기는커녕 일부 작가들의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는 심사의 공정성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처럼 국전은 많은 문제점들을 인지하고 시정, 개선하려는 노력이 시도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국전과 관련된 우리 미술계의 어두웠던 한 측면은 이제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미술대전이 퇴색된 국전을 답습해서는 안 된다.

신인 미술작가로 등단하려는 작가 지망생들이나 또는 이미 상을 받은 작가들에게, 미술대전은 오로지 실력과 재능으로 승부할 수 있는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옥석을 가려내어 실력자를 발굴해내는 제도는, 그 자체로는 매우 효율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그 과정의 엄정함을 제대로 지켜서,미술계 전체를 불신하게 만드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은 문학과 예술에 속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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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익명  |  8월 24th, 2009 at 4:27 pm

    대한민국 국전(國展)’

    30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대한민국 국전(國展)’ 명암(明暗)

    지난해 제 25회째를 맞이한 대한민국 미술대전.
    해마다 치러지는 미술대전은 예술계에서 유난히 잡음이 많다. 한국미술협회(미협)가 주최하는 미술대전에 대한 시비는 해마다 불문율처럼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은 1949년 시작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후신으로서, 정부가 운영해왔으나 1982년부터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을 거쳐 1989년부터 한국미술협회에 운영이 이관되었고 이름도 바뀌었다.

    사실 미술대전에 대한 시비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벌써 십수 년간 미술대전을 둘러싼 시비가 연례행사처럼 벌어져온 까닭에 미술대전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정작 상을 받은 작가는 미술대전의 수상경력을 내세우지도 못하는 형태다. 즉 작가로서의 커리어에, 잡음이 끊이지 않는 미술대전이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미술대전의 모태인 국전(國展)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전은 1949년 시작되어 1981까지 당시로서는 매우 역사적이고도 권위 있는 상이었다. 일제강점기의 문화지배수단에 동조했다는 비난으로 얼룩지기도 했지만 1930년대 선전에서 입상하는 것은 예술가로서 입신양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였다. 국전은 미술대전의 모태로서 국내 민족 미술인들에게 기회를 넓혀주는 긍정적인 효과를 주었지만 점차 그 의미가 퇴색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국전’을 알아야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 이해

    한국 현대미술의 기점을 설정하는데 있어 그 근거는 다르나 대체로 일치를 보이는 시점은 많은 미술단체들이 등장하는 1957년으로 볼 수 있다. 이때 등장한 단체들은 공통적으로 반국전을 기치로 기성화단에 대해 도전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이 새로운 미술창조를 위해 결별을 마지않았던 국전은 어떤 양상을 띠고 있었으며 그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도 끊이지 않는 잡음 속에서 20년 이상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또한 반국전 세력에 의해 한국 현대미술의 방향이 정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국전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한다.
    국전이란, 대한민국미술전람회(大韓民國美術展覽會)의 약칭으로, 그 규정 2조에 명시되어 있듯이 “우리나라 미술의 발전 향상을 위해” 정부가 주관하는 미술진흥책의 하나로 출발하였다. 국전이 창설된 것은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된 다음해인 1949년의 일로 동양화부, 서양화부, 조각부, 공예부, 서예부(사군자 포함)의 5대 부문으로 시작되어 후에 건축부와 사진부가 추가되었다.
    해방 후 화단에서는 미술 자체를 위한 예술 운동이나 단체의 결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정치적·사회적 혼란은 미술가들에게도 갈등과 대립의 장으로서의 미술세계를 구축하게 했으며, 특히 민족미술의 구현을 내세우면서 사회주의 문화이념을 표방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잡으려는 좌익계열이 적극적으로 행동함으로서 우익세력과 심한 마찰을 빚었다. 그러나 보수우익세력의 집권으로 정부가 수립되자 미술정책도 국가정책에 편승하여 문교부고시 제1호로 창설된 것이 ‘국전’이다. 이러한 국전 창설의 목적에 대해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국전 창설의 진의는 정부 수립 후 그때까지 방향을 못 잡고 있었던 전체 미술인들에게 정치적인 신념을 심어주고 국가적인 보호와 육성을 제공하는데 있었다. 민주진영의 미술인들에게 그들의 거점을 제공한 것이 국전이다.”

    민족미술 구현하지 못하고, 좌익과 우익의 마찰로 퇴색의 길 걸어

    명분상 국전은 ‘우리나라 미술의 발전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창립되었지만 해방공간시기에 좌익 미술인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던 민족미술인들을 감싸줄 수 있는 보호 장치로서 ‘국전’이 창설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전은 30회를 마지막으로 약 30년이라는 장구한 기간동안 존속했지만, 수많은 잡음을 일으켰고 아권투쟁의 온상이 되면서 유명무실 퇴색되었다. 국전이 퇴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시대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식민지시대 선전의 형태와 성격을 무비판 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 땅에 권위주의와 아카데미즘을 한층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우리나라 미술의 발전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창립된 국전은 해를 거듭할수록 모든 작가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기는커녕 일부 작가들의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는 심사의 공정성에 대한 의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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