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무리 남자에 대한 슬픈 고찰(남자는 100%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

동백꽃 엽서, 그리고 비 오는 날의 장례식

9월 30th, 2007 at 04:50pm DongWoo

‘그는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가슴 언저리 쯤의 단추를 매만지며 그녀는 말했다.
 
오늘 오후 별다른 계획이 없어 집 앞 카페 테라스에서 커피를 한잔 하며 까뮈나 마저 읽을 생각으로 거리에 나섰다.
마침 적당히 비도 내리고 있지 않은가. 물 입자가 허공으로 퍼지는 광경을 보며 폐 깊숙히까지 축축해지는 서늘함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팔을 활짝펴고 깊히 심호흡하며 늦은 오후의 사자처럼 어슬렁 커피 향기를 쫓아갔다. 그런 내 앞에 이토록 흐트러진 모습으로 이 여자가 나타난 건 뜻밖이다.
 
‘음… 왜 그렇게 생각하죠?’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가 알 수 있듯, 나도 그런 것쯤은 알 수 있어요’
 
 나는 잠시 그녀가 매만지고 있는 단추에 시선을 두다가 커피잔을 내려 놓았다. 잔과 탁자유리가 부딧쳐 가벼운 소리를 낸다.

카탕…
나는 속으로 그 울림을 흉내내 보고 유리창 너머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세로로 긴 바닷가로 방파제가 흉물스레 표류하고 있다. 늦은 오후의 해가 혀를 내두르며 길게, 아주 길게 잠식되어 간다. 사실, 이 여자와 내가, 이 시간에, 이 카페에서, 이렇게 긴 이야기를 나눌 이유는 없었다. 같은 학교라지만 복도에서 몇번 인사한 것이 전부이고 이름조차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갑자기 나타난 우연에서 의아할 정도로 흐트러진 여자의 모습에 더구나 까만 블라우스의 불길함이 나를 붙잡은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마치 장례식장의 불청객처럼 모나고 이질적인 모습으로 거리에 서 있었다. 탁자 위에는 한장의 엽서. 네 귀퉁이가 적당히 닳은, 아마 여러해 주머니 속에 있었음이 분명한 엽서에는 이름모를 산중턱의 만년설과 ‘happy’라는 글자가 조잡하게 인쇄되있다.

 

뒷면에는 말라 바스러져 몇잎 남아있지 않은 동백꽃이 테이프로 서투르게 붙어 있었다.
 
비를 맞아 처량토록
봉우리가 맺혔습니다.
당신을 닮은 것 같아
보냅니다
 
도대체 그 남자는 무슨 생각으로 이 엽서를 쓴 것일까. 당신이 히말리야 산 정상에서 무엇을 보고 또 무엇을 생각하였든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여자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졌다. 소소한 일상에서 애정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다. 안정된 생활, 그리고 차, 멋진 집, 나무랄 곳 없는 하루. 여자는 행복하였던 모양이다.
 
‘아아. 나는 나쁜 여자죠. 그쵸?’
 
그래. 당신은 참 나쁜 사람이야. 이런 말을 듣고 싶었는지 그 여자는 계속 얼굴을 감싸쥐고 흐느꼈다. 실종된지 벌써 6달. 이제는 더이상 어떠한 희망도 가지지 못하고 가족들 마저 그 남자를 공중에 묻었을 지금, 여자는 다시 상처를 헤집고 있다.
 
‘왜 이 엽서가 지금에야 도착하였을까요’
 
글쎄.. 이건 어떤 의미론 복수같은 건지도 모르지. 나는 말보로에 또 한번 불을 붙이곤 쇼파에 한껏 몸을 기댔다. 사람이 사람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 그리고 각인되어 고생대의 화석층처럼 말라간다는 것. 여자의 소소한 일상에서 남자는 잊혀지지도 않을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문득 언젠가 뒤적인 백과사전의 화석 사진들이 머리 속에 떠오른다.
 
몇 분 정도를 더 흐느끼다가 여자는 특별한 인사없이 몸을 돌려버렸다. 이제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새로운 먹잇감을 찾듯 거리를 헤매이다가 마음 속으로 퇴적된 돌맹이를 다른 이의 가슴에다 던져 버리겠지. 그러면 아마 그 사람도 강물에 닿은 발목 언저리로 자꾸 파문이 일어 일어서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여자가 일어난 후에도 나는 잠시 자리에 앉아 웨이트리스에게 커피를 좀 더 달랄까 고민을 했다. 6번째의 말보로에 불을 붙이며 까뮈 따위는 도저히 읽은 생각이 들지 않아  창 밖을 바라보다, 혼자 중얼거려 본다.
 
‘당신을 닮은 것 같아 보냅니다….’
 
도대체 겨울 속에 피는 이국의 동백이 그 여자와 무엇으로 닮아 있었던 것일까.

이 글은 소설/꽁트/시에 속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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